- 명칭: 줄루 왕국
- 위치: 남아키프라 일대
- 수도: 울룬디
-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 국가원수: 인코시
- 공용어: 줄루어
- 종교: 줄루족 토착 신앙
- 거주 종족: 줄루족
1. 역사
줄루 왕국은 아키프라의 왕국들 중에선 가장 늦게 탄생한 국가이다. 본래 줄루족은 남아키프라의 약소 종족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 한 사내에 의해서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그 남자의 이름은 줄루 왕국의 시조라 칭송받는 샤카 줄루였다. 샤카는 줄루족 수장의 사생아로서 태어나 축복도 받지 못한 채 촌락 한 구석에서 태어났으나, 한 예언가에 의해 '무적의 왕국을 세울 왕자'라는 예언을 받아 '샤카'란 이름을 받게 되었다. 사생아로 멸시를 받으면서 자란 샤카는 6세 때 어머니와 함께 촌락을 떠나 방랑하다 '음테트와 왕국'에 몸을 의탁하게 된다.
음테트와 왕국에서 어른이 된 샤카는 23세에 국왕 딩기스와요의 명령을 따라 전사로서 원정에 참가하여 6년 동안 음테트와 왕국의 최강자로 불리며 각지에서 훈공을 세웠다. 샤카는 실전에서의 경험을 살려 다양한 전술에 대한 제언을 국왕에게 상신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연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샤카의 친아버지가 죽자, 딩기스와요는 샤카를 측근들을 붙여 줄루족의 곁으로 돌려보냈다.
샤카는 고향으로 돌아가자마자 우선 센잔가코나의 계승자 '시그샤나'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해하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줄루의 왕이라고 선언했다. 새로운 국왕으로서 샤카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음테트와 왕국 시대에 익힌 실전경험에 기반한 군대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당시 아키프라 내에서 부족 간의 싸움이란 건 쌍방의 대표자가 춤과 위협으로 자신의 무력을 상대방에게 과시하는 데 주안을 둔 '힘에 의한 시위'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싸움의 승패도 실제로 벌어진 교전의 결과가 아니라 의식적인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결과가 많았다.
그러나 샤카 이후로 목가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던 부족 간의 싸움은 인정사정없는 살상전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엔 아세가이라는 투창이 널리 쓰였는데, 샤카는 이걸 부러트리고 보다 살상력이 높은 이클와라는 단창을 병사들에게 지급하여 신발을 벗고 맨발로 뛰게끔 훈련시켰다. 바꾸게 했다. 이러한 개량이 행해진 줄루족의 무기는 백병전에서 결정적인 효과를 가져와, 주변 부족들은 줄을 이어 줄루의 군문에 항복했다.
또한 부대편성도 개혁하여 전사들을 나이별로 분류한 연대(단수형으로는 '이브트'라 하고, 복수형은 '아마브트'라 한다.)를 편성하고, 출신 마을(크랄)에 따라 머리장식과 몸장식을 통일시켰다. 그리고 샤카는 이 새로운 편제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을까 생각한 끝에, 줄루 왕국군이 가진 근접전투에서의 파괴력을 더욱더 높일 수 있는 전술대형을 고안해냈는데, 그것이 바로 '거친 쇠뿔'이라 불리는 대형이다.
거친 쇠뿔 대형은 기본적으로 각 연대를 4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그들 각자가 상이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성립하는 전술대형으로, 우선 '머리' 부분이 정면에서 적과 격돌하여 적군 병사들을 구속하고, 그 사이에 '왼뿔'과 '오른뿔'의 역할을 맡은 양쪽 날개 부대가 적의 측면을 거쳐 일격에 후방으로 파고든다. 그리고 포위된 적을 쳐없애기 위해 후방에 온전히 남겨진 '허리' 부분(예비병력)을 전선에 투입하여, 고립된 적이 도망칠 틈을 주지 않고 적군을 완전히 섬멸하는 것이다.
이렇게 공격적이고 효과적인 전술로 주변 부족들을 흡수하며 승승장구하던 줄루 왕국은 지금껏 만나지 못한 강적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니던 브리튼 제국이었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 브리튼 제국은 남아키프라 전체를 손에 넣어 식민지로 삼고자 했고, 이를 위한 토대로 용이한 통치를 위해서 남아키프라 일대를 하나의 연방으로 합치고자 했다. 이에 문제되는 세력이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보어인이고 하나는 줄루족이었다. 보어인들은 브리튼의 해안 지방 장악을 피해 내륙으로 이동하여 여러 공화국들을 건국한 상황이었으나, 건국 이래 계속 줄루 왕국과 국경분쟁과 충돌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를 빌미로 삼은 브리튼 제국은 보어인들의 국가 중 하나인 트란스발 공화국에 개입하게 된다.
이로 인해 줄루 왕국과 보어인 간의 국경분쟁은 줄루 왕국과 브리튼 제국과의 국경분쟁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브리튼 제국은 줄루 왕국의 잦은 국경침범을 명분으로 계속 배상을 요구했고, 이런 분쟁이 늘어가던 도중 줄루족에 의한 브리튼 민간인 납치사건이 벌어졌다.
브리튼 측은 민간인의 즉각 석방과 납치범의 브리튼 측 인도, 배상금 지불, 선교의 자유, 그리고 줄루군의 해산을 요구하는 통첩을 전달했으나, 당시 줄루의 국왕이었던 케츠와요는 답신을 하지 않았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런던에서는 개전을 승인하여 '브리튼-줄루 전쟁'이 발발한다.
간단히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고 줄루 왕국을 얕봤던 브리튼군은 개전 직후 그 오만의 대가를 뼈저리게 치르게 되는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브리튼군 4천은 줄루족을 얕보고 들판에서 진을 쳤다가 그만 줄루군 2~3만에게 포위당해 병력 태반을 잃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현지 총독부와 본국 정부는 멘붕해 버렸고, 일각에서는 전쟁포기론이 제기되기까지했다.
그러나 이산들와나 전투 바로 직후, '로크스트리프트 전투'에서 줄루군의 또다른 병력 수천 명이 브리튼군 보급기지 겸 야전병원을 포위 공격했으나, 부상병 30여 명이 포함된 브리튼군 단 1개 중대 130여 명은 수천 명의 줄루군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고 승리한다.
극과 극인 두 전투는 각각 의의가 있었는데, 이산들와나 전투가 브리튼군의 초기 공세를 완벽히 돈좌시키고 전쟁 주도권을 줄루 쪽으로 넘겼다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멘탈이 나갈 뻔한 브리튼의 분위기를 반전시키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로크스드리프트 참전자들에게는 13개의 빅토리아 훈장을 포함한 다수의 훈장이 수여되었고, 언론에서는 이들을 영웅으로 대접했다. 여론은 이산들와나의 복수를 외치며 들끓었고, 여론의 압력을 받은 정부와 의회는 일각에서 제기된 전쟁포기론을 기각하고 대대적인 증원을 결의한다.
또한 두 전투 모두 전개 과정이 극과 극이었는데, 이산들와나 전투에서는 분산된 브리튼군 병력들이 숫적 우세를 점한 줄루군에게 대항하다 탄약이 부족해지자 탄약을 보급받기 위해 전령을 보내 요청했지만 보급부대는 전장 상황은 상관없이 무조건 온 순서대로 탄약을 보급하려고 했기 때문에 탄약이 고갈된 일선 병력들이 차례로 격파당했다.
그에 비해 로크스드리프트 전투는 소수라도 병력이 한군데 모여 있었고 각종 물품을 이용해 엄폐물을 구축하고 보유한 탄약을 대량으로 불출해 압도적인 열세인 병력 차이를 화력으로 메꿨다. 줄루족도 전쟁 이전부터 도입한 총기가 있고 이산들와나 전투에서 노획한 무기가 많았지만 사냥이나 개인간 싸움에서나 써봤지 대규모 병력이 운용하는 용도로 활용한 경험이 없어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산들와나 이후 줄루군은 승기를 탔으나, 그들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냉병기 위주의 군대로 근대식 군대 1개 연대를 격멸시킨 대가는 상상을 초월했다. 브리튼 전초기지들을 제거하려 한 줄루군의 시도는 브리튼군도 충분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브리튼군은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국경으로 일제히 퇴각했고, 이후 본국 증원부대 7개 연대가 도착하자 전면공세에 돌입했다.
줄루군은 냉병기 군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기습과 매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결국 수도 울룬디에서 숫적 우위를 바탕으로 결전을 시도했다. 줄루군은 브리튼군에 비해 최소 2배에서 3배의 숫적 우세를 지니고 있었으나 정예병들을 다 초기에서 잃었으며 개틀링건과 포병의 화력은 냉병기 위주의 구식 군대가 감당할수 없는 것이였다. 줄루군은 포병과 보병의 사격을 뚫고 접근하는데 성공했으나 포병의 포도탄과 개틀링건에 의해 전열이 붕괴하고 무너진 전열에 브리튼 창기병대가 돌입하여 대패한다.
패전이 확실해지자 줄루족 내 소부족장들이 항복을 청해왔고, 줄루 국왕도 저항의지를 잃고 포로로 잡혔다. 브리튼 원정군은 케츠와요의 폐위를 선언하고 본국의 지침에 따라 줄루 왕국을 총 13개 소부족왕국으로 나누어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브리튼이 전쟁 초기 노렸던 연방의 확대는 이뤄지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뤄지긴 했지만, 브리튼이 바라던 형태로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보어전쟁을 거치면서 브리튼의 행태에 분노한 보어인들이 보어 공화국 연합을 결성하였기 때문이었다.
2. 사회 및 문화
줄루 왕국은 국왕인 인코시를 중심으로 씨족 단위의 자급자족형 마을인 크랄로 구성되어 있으며, 평소에는 크랄들이 자급자족하다가 전시에는 각 크랄마다 전사들이 차출되어 온다. 또한 각 크랄에는 일종의 교육기관으로서 청소년들이 들어와서 훈련받는 '큰 크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 큰 크랄은 동시에 일종의 군사집단으로서 작용하여 엄격한 규율로 다스려진다.
주로 가축과 농업에 기반을 두었으며, 여성들은 그들의 몸을 덮는 옷을 입고, 짚과 구슬로 장식한 넓은 모자인 이시크홀로를 쓰고, 손으로 쇠가죽을 부드럽게 한 주름진 스커트인 이시드와바를 입는다.
3. 외교 관계
줄루 왕국이 존재했던 시절엔 특유의 호전적인 확장주의적인 성향 탓에 브리튼 제국 뿐만 아니라 코사 왕국 같은 주변의 다른 토착 왕국들과도 자주 충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