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매드마우스의 놀이터 2021. 8. 16. 14:32
  • 공식명칭 : 케메트 케디브국
  • 위치 : 북아키프라 나일 강 유역
  • 수도 : 카이로
  • 정치체제 : 인헙군주제
  • 국가원수 : 케디브
  • 공용어 : 케메트어, 시슬람어, 브리튼어, 콥트어
  • 종교 : 시슬람교
  • 거주 종족 : 다크 엘다르, 인간(사랍인) 등

 

1. 역사
아주 오랜 옛날, 북구 끝자락에 매머드 수인들이 살아남아 있던 시절, 아키프라 대륙의 북쪽 나일 강 오아시스에 다크 엘다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은 농사 짓기가 적합했기에 엘다르들은 나일 강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다른 지역들이 원시적인 수렵 생활을 하던 시절에 이미 강성한 고대 문명을 건설하였다.

엘다르들은 파라오로서 군림하며 수인 군대를 이끌고 주변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았다. 케메트 제국의 파라오들은 죽은 뒤에도 시간이 흐르면 영혼이 육신으로 되돌아와 다시 되살아난다고 믿었고, 영원히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었고 그 미라들은 피라미드 안에 안치되었고, 이 과정에서 충성스러운 메자이들까지 미라로 만들어서 같이 피라미드 안에 안치됐다.

제국은 수천 년 동안 유지되었고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제국들이 그랬듯이 케메트도 결국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대에 이르러 케메트가 롬의 손아귀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녀는 제국의 생존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자살하게 된다.

그렇게 케메트 제국은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고, 롬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게 된다. 편입 이후에도 케메트는 동방의 중심지이자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속주로서 중대한 위치를 유지했다. 롬 제국은 밀을 대부분 속주에서 공급받았는데 3대 곡창 중 한 곳이 케메트였기 때문에 이집트는 로마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했고, 몇 차례의 알렉산드리아 방화와 폭동, 십자교 박해, 십자교 국교화 이후의 '이교도' 탄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의 케메트는 그리크 문화와 토착 문화, 십자교가 한데 섞인 매우 독특한 문화가 번영했다. 케메트는 언제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고, 비잔틴 제국 시대까지도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 1세기, 성 마르코가 롬 제국 최초의 십자교 학교인 알렉산드리아 교리 학교를 설립했다. 롬 제국이 비잔틴으로 수도를 천도한 이후 케메트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지방이었으나, 그 때문에 계속 분리주의적인 모습을 보였고, 종교를 그 분출구로 삼았다. 흔히 알려진 삼위일체를 완전히 정립시킨 곳이 바로 다름아닌 케메트였으나, 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더욱 밀고나가 합성론이라고 하는 독자적 신학 노선을 밀었고, 그 결과 콥트 교회라는 이름의 새로운 신앙으 탄생한다.

케메트의 이런 번영+위세 덕에 알렉산드리아는 항상 비잔틴 제국의 중앙 정부와 반목하는 거대 파벌의 지배 하에 있었고, 앞서 말했듯 콥트교 교세가 가장 강했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시슬람의 군세가 침입해 오자 오히려 쌍수를 들며 별다른 저항 없이 사산조 파르사이에게로 넘어갔다. 이에 비잔틴 제국에선 케메트를 되찾고자 군대를 파견했으나, 그러나 제대로 패배하고 말았다.


케메트는 이로써 자신들의 독립 행보가 이어질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부터 케메트의 시슬람화가 시작되었고, 지배 초기에는 인두세만 받는 선에서 유화정책을 펼치던 시슬람교도들은 시슬람 통치가 확고히 자리잡은 이후로부터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러나 딱히 십자교도들에 대한 장기적이고 정책적인 박해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어서, 초기에는 시슬람화가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고, 콥트어를 금지하는 법령도 시행되지 않았기에 꽤나 오랜기간 동안 콥트어가 제2언어로 잘 쓰여왔다.

시슬람의 도해 이후, 알렉산드리아 대신 푸스타트라는 신도시가 세워져 케메트의 행정, 군사수도가 되었고, 케메트는 시슬람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 아바스 왕조 시대를 거쳤다.

 

10세기 초에 들어서선 파티마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카이로가 케메트의 수도가 된다. 그러나 파티마 왕조 또한 십자군 전쟁으로 쇠퇴하였고,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푸스타트와 카이로는 잿더미가 되었다. 또 이 전쟁을 기점으로 케메트의 시슬람 군주들은 십자교도들을 처형하거나 강제추방거나 노예로 삼는 등 크게 박해하였다. 유로파의 십자교도들과 내통한다고 의심받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구는 황폐화되었고, 이때부터 케메트의 시슬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8세기부터 사라비아에서는 튀르크족을 노예로 사서 용병으로 고용했으며, 케메트의 통치자들 또한 튀르크족 노예를 사들여 맘루크로 고용하였다. 이들은 아이리스의 십자군을 격퇴하는 등 꽤 유능한 모습을 보였으나, 케메트의 투란샤는 맘루크들을 불안요소로 여겼기 때문에 이들을 죽이고 새 군대를 배치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맘루크들에 의해 살해당하게 되었고, 이후 맘루크 사령관인 이즈 알딘 아이베크가 투란샤의 아버지 앗 살리흐의 아내 샤자르 알두르와 결혼해 새 술탄으로 즉위하였고, 이때부터 케메트는 술탄이 사령관도 맡는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었기에 아이베크는 14세 소녀를 첩으로 맞이하려 했으나, 아내인 샤자르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후 샤자르도 하녀에게 살해당했고, 맘루크들은 사이프 아드딘 쿠투즈를 새 술탄으로 추대하였다.

몇 년 뒤, 대칸제국의 사절이 카이로에 도착하였는데, 쿠트즈는 사절을 죽이고 카이로의 대문에 그 목을 매달아놓는다. 이에 분노한 대칸제국은 케메트로 출정하였으나, 4대 대칸 헌종이 사망하자 장군 키트부카 장군의 부대를 제외한 전군이 급히 철수하게 된다. 이후 쿠투즈는 키트부카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전대 술탄처럼 쿠투즈도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랬고, 바이바르스가 3대 술탄으로 즉위하게 된다. 바이바르스는 십자군 도시들을 정복해나가기 시작했고, 후대 술탄인 칼라윤과 알 아슈라프 칼릴 대에 이르러선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내게 된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서 맘루크 왕조는 시슬람 세계의 구원자가 되었고, 이후 실질적 시슬람의 종주국으로서 세계의 중심 해역 상권을 장악하며 큰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6세기부터 파르투갈의 신항로 개척으로 인해 수입원이 줄기 시작하였고, 바라트해로 함대를 보내 파르투갈 무역선을 공격하였다. 이에 파르투갈도 함대를 보내면서 두 함대 사이에서 해전이 벌어졌고, 최후엔 파르투갈이 승리하게 된다.

 

이후 히랄 제국이 맘루크 술탄국을 공격하였고, 마르즈 다비크 전투에서 술탄인 알 가우리가 전사하면서 히랄 제국의 세력권 내에 들어오게 된다. 하지만 히랄 제국은 기존 지배층들인 맘루크들의 존속을 허용해주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히랄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총독인 왈리들이 사실상 허수아비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고, 이 틈을 타서 알리 베이 알 카비르가 히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나폴레옹의 아이리스 군이 공격하여 피라미드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이후 나폴레옹은 다시 아이리스로 돌아갔고, 맘루크들은 히랄 제국과 브리튼 제국을 상대로 저항하였다.

 

19세기 초, 히랄 제국의 무함마드 알리가 케메트의 새 왈리로 부임하였고, 아들의 사라비아 원정대 사령관 취임식 축하 명목으로 주요 맘루크들을 자신의 궁전에 초대하였는데, 무함마드 알리는 카이로의 알 아잡 성문 근처에서 그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그 다음 주에는 케메트 전역에서 3000여 명의 맘루크와 그의 친인척들을 학살하였고, 이에 일부 맘루크들은 케메트를 탈출하여 푼즈 술탄국을 건국하였다. 그러나 결국엔 이들조차 마지막에 항복함으로써 맘루크들은 더 이상 무함마드 알리에게 저항할 힘을 잃게 된다.

 

이후 알리는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게 되었고, 서방과 적극적인 접촉을 가지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렀다. 그리고 히랄 제국과 갈라서기 사작했고, 브리튼의 중재로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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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케메트는 근대화를 통해 산업적으로 크게 발전하였고, 남북전쟁 기간 동안 면화가격 폭등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으나 이굴 합중국의 면화가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내부 반란을 브리튼군이 대신 진압해준 뒤로 브리튼의 보호령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케메트는 많은 이권을 브리튼에게 빼앗겼고, 수에즈 운하 주식을 브리튼이 구입하면서부터 간섭이 심해졌다. 이를 참지 못한 이들에 의해서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브리튼 제국은 이를 빌미로 군대를 파견하였고, 반란을 진압한 뒤 계속 군대를 주둔시킴으로써, 케메트는 브리튼의 영향권 하에 놓이게 된다.

 

2. 사회 및 문화
고대 케메트 제국은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로 대표되는 고대 문명으로, 케메트의 오랜 자부심 중 하나이다. 피라미드(고대 케메트어로는 '마레')로 대표되는 웅장한 석조 건축물들은 알록달록한 벽화와 흰색 외장재들로 치장되어 있었고, 비록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모래색 폐허들로 변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제국의 영광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케메트의 피라미드 내에는 옛 신들의 형상을 한 고대 골렘들과 스핑크스들이 제국이 몰락한 이후로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주인들의 안식처를 보호하고 있으며, 도굴꾼들을 철저하게 응징하였다.

 

케메트에는 여러 종족들이 공존 중인데, 그 첫번째는 고대 케메트 문명의 후예인 다크 엘다르들로, 대부분은 콥트 신자들이다. 달력은 고대 케메트 시절의 태양력이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각 달의 이름도 고대 케메트의 신들의 이름과 거의 유사하다. 부활절이 오기 전 55일간 단식을 하며, 육식을 하지 않고 올리브유로 요리한 음식만 먹는다. 어릴 때부터 예수의 십자가형을 기억하고 신앙과 정체성을 유지하겠다는 의미로 손목 안 쪽에 하늘색 십자가 문신을 새긴다. 고유 언어인 콥트어는 고대 케메트어의 직계 후손이기에 케메트어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연구 자료로 평가받는다. 이들 다크 엘다르들 외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예인 그리크 계통 순혈 하이 엘다르들도 소수 거주하고 있다.

 

나일 강 남쪽 누비아에 거주하는 전갈 충인족 누비아족은 고대 케메트의 문명과 거의 쌍벽을 이루었던 쿠시 왕국을 건설했던 종족으로,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번영해온 종족이다.

 

나가의 분파인 베자족은 호전적이고 배타적인 일족이었으나, 고대 케메트의 파라오들은 그들의 용맹함을 높이 사서 그들을 호위대 및 치안유지대 '메자이'로 징집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이들에겐 박한 평가를 받아서 그들에게 500년간 애먹은 롬 제국은 베자족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파르투갈의 한 서적에선 베자족은 거칠고 문명도 성실함도 예의도 없다고 기록되었다. 이들은 너무 과묵해서 가족끼리도 말을 잘 섞지 않으며, 기본적으로는 시슬람교를 믿지만 토착신앙하고 뒤섞여서 토착신앙 색이 짙다.

 

시위족은 베르베르의 한 분파로 올리폰트의 일원으로, 주로 시와에 거주한다.

 

맘루크 술탄국의 주요 구성원이자 지배계층으로 투르크계인 맘루크족은 매 조인으로, 카카스 산맥 너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맘루크는 본래 종족명이 아닌 노예로 구성된 정예 부대의 명칭이었으나, 그 맘루크의 구성원 중 대다수가 이 종족 출신들이었기에 그대로 종족명이 되었다. 이들의 본래 종족명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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